그 때 정확하게 무엇이 날 깨운걸까 침실에 퍼져있던 비릿한 피냄새였을까 침대를 조금씩 물들이고 있던 피웅덩이의 따뜻하고 끈적한 감촉이었을까 내가 반쯤 잠에서 깬 상태로 일어나자마자 소리를 지른 건 또렷하게 기억한다 내 아내, ‘달라’는 내 비명을 듣고서도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흐릿하게 간신히 눈을 반쯤 뜬 채로 힘없는 목소리로 내 말에 반응했다
“무슨... 일이에요?...”
아내가 무의식 중에 중얼거렸다
“당신, 정신차려 당신, 당신... 피 흘리고 있어“
내가 소리쳤다
“이런… 이런 젠장, 젠장 어떡하지”
당황해서 무엇부터 해야할지 정신이 없었다 아내의 상태는 심각해보였다 침대보를 다 적실 정도로 이미 많은 양의 피를 흘렸고 핏기 없는 피부에 눈동자에는 생기를 이미 잃은 채였다
내 머릿 속에선 상상도 하기 싫은 최악의 시나리오만이 떠올랐다 이대로 아내와 사별하거나 아니면 아내 뱃속의 아이들을 잃거나 ...아니면 나 혼자 남게 되는 것
그런 와중에 아내는 흐린 눈으로 천장을 응시하고 있었다 의식이 점점 희미해지는 게 분명했다 그제서야 피로 물든 이불을 걷어차고 나와 아내를 들쳐업고 미친듯이 차로 달려갔다
병원으로 가는 도중에 악셀에서 발을 뗀 적은 있었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신호등에 빨간 불이 들어올 때마다 나는 중앙선을 침범해 달렸고 나중에 벌금이 얼마나 나와도 수긍할 수 밖에 없을거다 두 손으로 핸들을 꼭 붙잡고 있으면서도 운전에 도저히 집중할 수가 없었다 병원까지 멀쩡히 도착한 건 기적이었다 아내 없이 혼자 남게 되는 건 상상조차 하기 싫었다 나는 병원으로 달려오는 내내 마음 속으로 몇번이고 간절히 되뇌이고 있었다
‘하느님 제발 아내를 데려가지 말아주세요’
난 주차 같은 건 신경 쓸 겨를도 없었다 곧바로 병원 입구로 차를 몰았고 중립기어에 놓고서 아내를 업고 뛰었다 병원에 들어서자마자 아무나 좀 도와달라고 미친 사람처럼 소리를 질러댔다 여기서부턴 어떻게 됐었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병원 관계자가 달려와 아내를 이동식 침대에 눕히고서 재빠르게 밀고 나갔다 그리고 난 피투성이가 된 채로 서서 간호사의 질문에 답을 해야했다
“지금 임신 8개월 째에요”
내가 흐느끼며 말했다 목 뒤로 눈물이 넘어와 발음이 엉망이었다
“제발 살려주세요 제발…”
“진정하세요 선생님”
간호사는 무표정한 얼굴로 골백번도 더 했을 말을 뱉었다
“저희가 할 수 있는 건 뭐든 최선을 다할 겁니다 선생님께선 진정하시고 저희를 도와주셔야죠”
‘이 상황에서 누가 차분할 수 있지? 아내가 죽어가고 있는데?'
“혹시 아내분이 드시는 약 있으신가요?”
“아뇨 아니 아니 자, 잘 몰라요 비타민제, 비타민제도 중요한가요?”
“어쩌다 다치신 건지는 아시나요?”
“아뇨 몰라요 난, 우리는 전부 그냥 자고 있었어요”
‘날 지금 의심하는거야? 이 꼴을 보고도?’
난 숨에 차올랐다 다리는 버티고 서있는게 고작이었다 눈물이 두 눈에서 멈추지 않았다
나는 그런 상태로 간호사의 질문에 전부 성심성의껏 답했다
“감사합니다”
계속해서 무표정한 간호사가 말했다
“선생님 진정하시고 앉아계세요 소식이 있으면 제가 전달해드릴게요”
진정? 앉으라고? 나보고 앉아서 기다리라고? 전부 다 엎어버리고 싶었다
하지만 선택의 여지는 없었다 병원은 이런 곳이니까
나는 막 날 등지고 걸어가려는 간호사에게 다시 불러세웠다
“저기요”
“네?”
“제 와이프... 괜찮은거죠? 네?”
“일단 가서 기다리세요”
괜찮다는 말은 병원에서 쉽게 들을 수 있는 말이 아니었다
기다려라, 진정해라, 전부 아내가 다시 깨어나는 것과 아무런 상관이 없는 일이다
이 상황에서 내가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게, 무능력한 게 너무나 괴로웠다
남편으로서 아내를 남의 손에 맡겨야 하는 상황이 너무나 괴로웠다
병원 복도에 덩그라니 홀로 남겨지자 불안, 공포, 슬픔, 공황이 차례로 찾아들었다 내가 여기서 할 수 있는 건 오직 견디는 것 뿐이었다
나는 벽에 몸을 기댄채로 몸을 잔뜩 웅크리고는 두 손에 얼굴을 파묻었다 이 상황을 믿을 수 없었다 미친 듯이 뛰는 심장이 느껴졌다 항상 이럴 땐 엉뚱하고 말도 안되는 생각이 떠오르기 시작한다
‘오늘 직장은 어떡하지 이틀 후에 중요한 프레젠테이션이 있는데…’
‘손주 본다고 좋아하시던 부모님께는...아니 장인어른께는 뭐라 말씀드리지...’
“병원은 한번씩은 오기 좋은 곳 같죠 안그래요?”
어디선가 활기찬 목소리가 들려왔다 난 목소리의 주인이 누군지 보기 위해 고개를 들었다
아무런 발소리도 못들었고 나 혼자였었는데... 하지만 어디서 나타났는지 내 옆에는 젊은 남자가 서있었다 나이는 한 이십대 중반은 되었을까 그는 긴 금발머리에 청바지와 하얀 후드티 차림이었다
내가 퉁퉁 부은 눈에 온 몸이 피투성이인 채로 그를 쏘아보자 그는 입술 사이로 반듯한 치아를 드러내며 웃어보였다 도저히 잊을 수 없는 웃음이었다
“너 이 새끼 방금 뭐라고 했어”
나는 눈에 뒤집혀서는 목에 핏대를 올렸다 이미 난 반쯤 정신을 놓은 상태였다 아내 목숨이 위태로운데 이런 쓰레기와 말섞을 때가 아니었으니까
“병원 말이에요 아저씨”
그가 낄낄거리며 말을 이어갔다
“병원에서 다른 사람 우는 거나 죽거나... 그런거 보면 살아있는게 참 다행이라고 생각 안해요?”
난 순간 피가 솟구치는 걸 느꼈다 당장 얼굴에 주먹 한 방을 꽂아버리고 싶었지만 내 마음 속의 뭐라 설명할 수 없는 것이 날 붙잡는 걸 느꼈다
“여기와서 누구 한번 속 긁어볼 요령이라면 사람 잘못 골랐다는거 제대로 알려주마”
나는 화를 애써 꼭 눌러담았다
“내 와이프 때문에 한번은 봐주는 거다”
남자는 갑자기 숨넘어가듯 웃기 시작했다
“저도 당연히 알죠 이름이... 달라였나? 여긴 노인들이나 와서 누워있다 저 세상 가는 곳인데
너무 이른 나이네요 아쉽겠네 그치요?”
난 놀란눈으로 그를 쳐다봤다
‘어떻게 안거지? 내가 병원에 뛰어들어왔을 때 로비에 있었나? 아까는 본적 없었는데’
“뭐야 젠장 넌 뭐하는 놈이야”
놀란 내 입에서 반쯤 욕설 섞인 말이 튀어나왔다
“전 모르는 게 없죠 아내분을 처음 본 게 대학교 때? 결혼 반지는 … 지지난 달에 한번 잃어버리셨다가 보름 후에 차고에서 찾으셨네 가끔 그럴 때 있죠
결혼 기념일은…12월 22일 … 얼마 안남으셨는데 안타깝네요
그리고 닉, 지금 아내분이 위태로운 것도 알아요 피가 글쎄 아직도 나오고 있어요 참 큰일이죠”
그는 빈정거리는 말투로 내 가정사를 책을 읽듯이 읊어댔다
“너, 헛소리 한번만 더 지꺼려봐..”
내 말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듯 가볍게 웃음 짓고선 그가 내게 가까이 몸을 낮췄다
“이건 어때요?”
얼굴이 가까워지자 그의 눈은 영롱한 초록색 에메랄드 빛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하지만 그가 다가왔을 때 난 그를 믿을 수밖에 없었다 너무나도 익숙한 카모마일 샴푸향에 희미하게 느껴지는 아몬드 오일향, 의심할 데 없는 내 아내의 체취였다
“의심이 다들 많은 건 이해 합니다만…앞으로 5분 남았어요”
그가 이죽거렸다
“의사들이 저기 저문을 통해서 아저씨한테 올거에요 그렇다고 너무 우울해하지마요 이거 인생 다시 피는 걸 수도 있잖아요”
“뭐..뭐라는 거야 이 새끼가”
잠시 말랐던 내 눈에 다시 눈물이 고이기 시작했다 나는 그 말을 곧이 곧대로 믿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 남자의 세포 하나 하나가 진실과 신뢰로 빛나고 있었는 것 같았다
“아, 뱃속에 아이?”
가증스럽게도 그는 자신의 배를 가르켰다
“아이 둘 다 무사할거니 걱정마요 싱글대디 하는거지 앞으로 힘들고 허덕일거에요 매일 술독에 빠져 지내다 그렇게 인생 끝나는게 보여,
장례식엔 올 사람 없을거니 뭐… 기대하지마시고 인생이 그런거에요”
머리카락을 감싼 내 손에 나도 모르게 힘이 들어갔다 그의 말이 뱀처럼 내 마음 속으로 기어들어와 또아리를 틀고 있었다 그리고 곧 내 의식에 음침한 절망을 토해내고 용서할 수 없는 형체로 변해선 더 깊은 곳으로 파고 들었다
“아니, 아냐”
목에서 흐느끼는 소리가 흘러나올 뿐이었다
“장난치지마 당신은 의사도 아니잖아”
남자는 그의 코를 긁적이더니 다시 한번 웃으며 말했다
“그래도… 아저씨는 운이 참 좋네요”
“...무슨 말이야 그게?”
나는 고개를 들고 그에게 울음 섞인 목소리로 되물었다
웃고 있던 남자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키는 컸지만 깡마른 그의 몸이 한 눈에 들어왔다
하지만 꺾일 듯한 그의 몸에서는 순수한 악의가 스며나와 그를 몸을 지키고 있었다
그것만으로도 그 남자에 대한 왠지 모를 불쾌한 경외감이 느껴졌다 그 앞에서 나는 그가 발로만 슬쩍 움직여도 밝혀버릴 한 낱 개미에 불과했다
“목숨은... 목숨으로만 대신할 수 있죠”
그가 오른팔을 뻗어 응급실 문을 가르켰다
“정확히는 아저씨 아내분의 목숨 말이에요”
나는 가만히 그의 팔을 응시했다
‘무슨 말이지 내 아내를 다른 목숨으로 대신한다니? 이게 말이 되는 일인가? 이 남자는 대체 누구지?’
“아주 간단해요 아저씨”
이번엔 그가 몸을 굽힌 채로 나에게 속삭였다
“아내의 목숨을 구해드릴테니 다른 목숨을 주시는 거에요”
나는 아직도 그의 손을 굳게 긴장된 상태로 보고 있었다 이건 뭔가 잘못되었다 자연의 섭리에도 있을 수 없는 일이고 성스러운 일과도 정반대였다 해서는 안될 거래였다
“누굴 원하는거야...”
나는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그에게 물었다
“그러니까 누군데!”
남자가 다시 웃으며 말했다
“다들 항상 그걸 물어보시더군요 사람 목숨 자체가 귀중한게 아니라 그게 아는 사람이냐가 중요한 법인가봐요”
“누구냐고!”
내가 다시 외쳤다
“걱정마세요 아저씨”
그가 낄낄거리며 말했다
“당신이 아는 사람은 아니에요 전혀 만난 적 없는 사람이죠
앞으로 존재한 적도 없게 사라지게 될거에요 완전히, 사라지는 거죠 흔적도 없이, 일생일대의 기회죠? 아저씨 저라면 놓치지 않을거에요”
걷잡을 수 없이 몸이 떨렸다 머릿속에 한치 앞도 보이지 않는 자욱한 안개가 낀 기분이었다 하지만 난 망설일 수 없었다 내겐 선택권이 없었으니까 아내를 살려야하니까
나는 일어나서 아무 말없이 그의 손을 잡았다
“닉 잘 생각했어요”
그가 또다시 웃음을 터트렸다
“후회없는 선택일거에요 언젠가 제게 감사할 날이 올겁니다”
“이제 그만-”
내가 막 뭐라 대꾸하려는 찰나 응급실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내가 다시 뒤돌아 그가 있던 장소를 봤을 땐 그는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소름끼치게도 손을 잡았던 그 차가운 감촉은 계속 느낄 수 있었다 마치 아직도 긴 악수를 끝마치지 않은 것 같았다
“매튜 씨”
방금 전과 전혀 다른 의사의 따스한 체온이 내 손에 느껴졌다
“다행입니다 아내 분은 잘 견디고 계세요 많이 지친 상태지만서도 안정을 찾은 상태입니다”
그제서야 난 웃을 수 있었다 아니 울음이 다시 나왔다 이보다 좋은 두 마디는 없을 터였다 아내가 살아있다, 아내는 괜찮다 그때보다 행복했던 건 내 생애 없었다 하지만 금새 왠지 모를 안좋은 예감이 뇌리를 스쳤다
“선생님 그러면 ... “
“아 아이 말씀이시군요”
의사는 웃으며 내가 무슨 말을 할지 알고 있다는 듯이 내 말을 듣기도 전에 대답했다
“걱정 안하셔도 됩니다 선생님 아드님은 굉장히 건강한 상태에요 긴급 제왕절개 수술을 진행했지만 건강한 아이더군요 곧 아내와 아드님 모두 만나실수 있을 겁니다”
“아들?”
나는 가만히 그 말을 되뇌였다
“아들이라고요?”
아까도 말했듯이 난 미치지 않았다 완전히 제정신이야
아내와 내 아들은 건강을 회복했다 건강하고 행복해보인다
아내는 이해하지 못했다 내 정신이 이상해져 버린걸까
환각에 빠진 것도 아니었다 마약에 손댄적도 기필코 없었다
나는 의사의 검진 때마다 아내와 함께 갔었다
초음파 검사에 산모 신체검사일까지 나는 아내와 모든 순간을 함께 했다
내 머리 속에 종양 같은거라도 있어서 헛것이라도 본 걸까
난 정신병원 근처도 가본 적 없는데
그런데 왜 다들 날 미친 거라고 생각하지
왜지 왜 나를 믿지 않는 거야
헛소리를 하는게 절대 아니야
내가 본 것은, 들은 것 전부 사실이야
나는 아직도 모든 순간을 전부 다 기억해
나는 아내가 임신했을 때도 생생히 기억한다고
아내는
분명
쌍둥이를 가졌었어
재밌는 썰,괴담 보고가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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